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(문단 편집) === 2차 대전 이후 === [[일본 제국]]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항복하자 호치민 휘하의 베트민은 8월 16일 총 봉기를 일으켜 8월 말쯤에는 북부 대부분을 장악하였다. 하지만 [[일본군]]의 무장해제를 명목으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남부에는 [[영국군]], 북부에는 [[중화민국]]의 [[국민혁명군]]이 들어와 점령하였다. 그런데 종전 이후 [[중국 대륙]]이 [[국공내전]]에 휩싸이게 되면서 [[국민혁명군]]이 베트남 북부에서 철수해 '''사실상 공백지대'''가 되어 버렸다. 이 기회를 포착한 호치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 항복 서명일에 맞춰 [[일본군]]을 본인들이 무장해제시키고 1945년 9월 2일 [[베트남 민주 공화국]]의 건국을 선포했다. 다만 후술할 이유로 인해 당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[[미승인국]] 처지로 1950년이 되어서야 [[소련]]과 [[중국]], [[북한]]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. 한편 남부의 [[영국군]]은 이 지역에 선거를 통한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들을 자주 했지만 프랑스 영토였던지라 결국 프랑스에 돌려주고 돌아가 버렸다. 사실 영국은 [[인도 제국]]과 [[영국령 버마]]의 독립 요구에 시달리고 있어 훈수 둘 처지도 못 되었으며 병력 부족으로 비시 잔당들과 일본군 포로 일부까지 치안 유지에 동원한 탓에 깽판치던 [[국민혁명군]]보다 더 미움을 받았다. 이런 [[영국]]의 정책은 [[프랑스 제4공화국]]에게 다시 한 번 베트남을 식민지 영향 아래에 둘 수 있다는 착각을 주었는데 영국은 증가하는 민족주의가 주변의 인도나 버마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해 베트민과 협상을 하지 않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[[민주주의]]와는 거리가 먼 정책을 썼다. 이로 인해 영향력 있던 베트민과 협상 한번 하지 않고 들어간 프랑스는 베트남이 순순히 [[식민지]]가 될 것이라고 착각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